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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학원강사 알바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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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래 전 이라고 말하기에는 얼마 전 까지 알바를 했었기 때문에 ㅡㅡ;;
 
암튼..알바를 참 많이 했었던 것 같다.
 
대충 헤아려 봐도 법인이나 개인을 따져도 대충 천군데는 넘을 것 같다.
 
뭐 그래봐야 직종은 막노동, 막노동, 막노동, 막노동이지만.
 
 
 
암튼 나의 첫 알바는 친구 놈 통해서 얻게 되었다.
 
뭐 돈을 받는 일로 따지면 그 전에 고딩 때 축가 불러 주고 용돈 좀 받은 게 있는데
 
그건 열외로 치고.
 
 
 
친구놈 옆집에 소위 말하는 오야지(막노동에서 일꾼무리의 우두머리)였다.
 
그 덕에 했던 일이 바로 닥트(소위 덕트라 불리는 환풍기 조립 및 설치)였다.
 
돈 만원이면 술집에서 소주2병과 찌게 안주를 먹고도 돈이 약간 남을 정도의 물가였던 시절에
 
거금 6만원짜리 일이었다.
 
지금이야 석면이란 것의 무서움을 알지만 그때는 그런거 없었다.
 
보호장비 없이 그냥 장갑 끼고 먼지 풀풀 날리는 석면을 함석판에 둘둘 감는 일을 많이 했었다.
 
얼마 간 일을 따라 다니니 도면 보는 법과 함석 자르는 법을 알려 주셔서
 
또 한동안은 그 일만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첫 알바를 막노동으로 시작을 했다.
 
 
그 이후 내가 알바를 얻던 주요 경로는 처음에 말한 친구놈의 소개를 받아 알게 된 직업소개소였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2만원인가 3만원인가를 등록비로 내면,
 
그 다음 부터는 알바꺼리가 생기면 전화연락을 주는 구조였다.
 
그런데 그때 우리에게 일을 소개시켜 주던 직업소개소의 누님이 우리와 꽤 친해 졌기 때문에
 
나름 일당이 쎈 일들이 주로 우리에게 떨어져서 꽤 쏠쏠했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나의 알바는 시작되었다.
 
알바를 하면서 나의 철칙은 오로지 일당이 쎈 일 이었다.
 
그래서 당시 흔히들 많이 하던 편의점알바나 카페 알바는 하지 않았었다.
 
과외는 나름 꽤 들어 왔었지만 내가 학생을 가르치면 나 같은 놈들만 양산될 거란 생각에
 
애국하는 셈 치고 거절했었다.
 
 
그렇게 계속 거절을 하다 군 입대를 일년 여를 남기고 과외도 아닌 학원강사를 하게 되었다.
 
동네에서 보습학원을 운영하시던 아버지 친구분의 동생이 하시던 학원이었다.
 
 
서론이 무척 길었다.
 
나의 알바열전의 첫번째 주제는 학원강사이다.
 
 
당시 내가 맡았던 과목은 과학이었다.
 
문과생이었지만 대상이 중학생이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었다.
 
매주 수요일 6시에 출근해서 밤9시까지 딱 하루만 출근하면 되는 것 이었다.
 
그리고 월급으로 한달에 무려 40만원을 받았었다.
 
그것과 동대문새벽시장 물품보관소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을 합치면
 
나름 당시 잘나간다는 대기업의 초봉 정도의 돈은 벌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돈들은 연애질과 후배들 관리에 몽땅 탕진해 버렸지만 ㅋㅋ
 
 
학원강사를 하면서 내가 제일 주력했던 것은 아이들과 친해지기였다.
 
공부는 그 다음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한달 정도는 아이들의 특성을 파악하는데 주력했었다.
 
그 결과 3학년 남자 아이들 중 몇 명이 소위 불량기(?) 있었고
 
그들이 학원을 주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놈들은 어릴 때 내가 그랬던 것 처럼 온갖 장난질로 수업을 난장판을 만들고는 했었다.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한동안 고민 끝에 찾은 해결책은 그들과 함께 노는 것 이었다.
 
어느 날 학원을 끝내고 셔틀버스를 타고 그 녀석들과 집에 가는 길 이었다.
 
당구이야기를 한참 하길래 중간에 끼어 들었다.
 
" 니가 그렇게 당구를 잘 쳐? 몇 치는데? "
 
" 선생님, 쟤 당구 무지 잘 쳐요. 무려 80이나 쳐요 "
 
" 그래? 잘 치네? "
 
" 선생님은 당구 칠 줄 아세요? "
 
" 나야 뭐..150 밖에 못 쳐. "
 
" 우와! 말도 안돼. 구라치지 말아요. "
 
" 그럼 우리 당구장에 한번 가볼까? "
 
" 진짜요? "
 
 
 
그렇게 그 아이들을 끌고 당구장에 갔다.
 
당구를 치는데 당연히 그 녀석들은 내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당구를 끝내고 나니 그 아이들이 날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한마디 했다.
 
" 니네 당구 잘치는 법 알아? "
 
" 뭔대요? "
 
" 수학하고 과학을 잘하면 돼. "
 
" 에이, 당구랑 수학,과학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
 
" 니네가 고등학교 가면 배우겠지만 수학에 삼각함수란 것이 있어.
 
  이걸 이용하면 내가 원하는 데로 공을 맞출 수도 보낼 수도 있어. "
 
" 우와 진짜요? "
 
" 그럼 "
 
당연히 이론적으로는 그렇지만 당구를 그렇게 치지는 않았고 또
 
그 만큼 내가 수학계산을 빨리 할 수도 없었다는 것은 논외로 치자.
 
 
 
그 다음 부터 아이들이 날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리고 자신들과 동질감을 느꼈는지 전과는 다르게 자신들의 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난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로는 공감도 하고 때로는 타이르기도 하면서
 
눈높이를 맞추려 노력했었다.
 
그러자 항상 수업시간에 장난만 치던 녀석들이 수업시간도 아닌데 일찍 학원에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3학년은 말할 것도 없고 1,2학년 교실까지 들어와서 지들이 분위기를 잡고 간다.
 
그 덕에 수업분위기가 한결 좋아 졌었다.
 
 
 
사실 그렇게 아이들과 친해진 이후 부터는 수업은 뒷전이었다.
 
수업시간 한시간이면 수업하는 실제 시간은 10분내지 20분 정도 였다.
 
나머지는 아이들과 대화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아이들 성적이 올랐다.
 
특히 내가 가르쳤던 생물을 포함한 과학과목들은 평점점수가 거의 90점대를 육박 했었다.
 
나는 수업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알아서 공부를 해 왔다.
 
아이들 성적이 오르니 원장선생님도 내 수업 방식에 대해서 특별히 간섭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이들 성적이 나오면 수고했다고 아이들과 노래방이라도 가라면서
 
돈을 주시고는 했었다.
 
 
그때 많은 것을 느꼈다.
 
지식을 집어 넣는 것 보다 아이들과 공감하는 것이 더
 
아이들에게 교육효과가 크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공부란 것은 스스로 하고 싶은 의지를 느낄 때 가장 효과가 좋은 법 이다.
 
내 경험에 비춰 봐도 그랬었다.
 
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공유했고 아이들은 그런 나를 위해 - 나와 오래 있기 위해
 
스스로 공부를 했었던 것 같다.
 
 
사실 이 방법은 학원강사를 하기 전에 교회에서 중고등부 선생님을 몇 년 하면서
 
경험한 것 이었다.
 
소위 문제아라 불리는 아이들일 수록 이런 방법은 효과가 더 컸었고,
 
더 쉽게 마음을 열었던 것 같다.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친구처럼 다가가는 것.
 
그것은 그 이후로 내가 누군가를 가르칠 때 꼭 먼저 하는 일이 되었다.
 
 
암튼 그 친구들과는 군입대를 하면서 헤어지게 되었다.
 
군입대하기 직전 마지막 수업 때 아이들이 나에게 전해 주었던 수십장의 엽서를 이어 만든
 
롤링페이퍼가 기억에 남고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그 녀석들은 줄 선물이 또 있다면서 '이등병의 편지'를 연습해 와서
 
노래방에서 그 노래를 불러 날 눈물 짓게 만들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그 녀석들 중에 한 명을 우연히 홍대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나도 서른이 다 되어 가던 나이였고 그 녀석도 이십대 중반에 접어들던 나이였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훨씬 큰 덩치가 그 사람 많은 곳에서 날 발견하고는
 
꾸벅하고 큰 인사를 했다.
 
" 엇! 선생님 이게 몇 년 만이에요. "
 
" 너 혹시 XX 아니냐? "
 
" 네, 맞아요. "
 
" 이야..많이 컸네.. 너 아직도 몰려 다니면서 껄렁껄렁하게 다니냐? "
 
" 에이, 제가 앤가요. ㅎㅎㅎ "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 졌었다.
 
그 뒤로 그 아이들 중에 만나게 된 아이들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상암동이 월드컵으로 재개발되면서 많은 아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졌던 것도
 
큰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해 본다.
 
 
암튼 기억에 남는 알바 중에 하나가 약 1년 반에 걸친 학원강사였다.
 
물론 그 이후로 다시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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