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썰.ssul

알바 - 동대문 새벽시장, 음료창고 알바 썰

반응형


.



첫번째 알바이야기에서 학원강사 이야기를 했다.
 
이번 이야기도 그 시절 이야기이다.
 
 
당시 내가 했던 알바는 총 세 개 였다.
 
처음 이야기했던 학원강사.
 
동대문새벽시장 물품보관소 아르바이트.
 
그리고 신당동의 음료창고 아르바이트였다.
 
 
학원강사는 이야기했고.
 
오늘은 동대문새벽시장과 음료창고 아르바이트 이야기를 해야겠다.
 
 
당시 내가 살던 동네에는 꿀알바가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동대문새벽시장 물품보관소 알바.
 
뭐..이름은 길고 거창한데 별 거 없다.
 
그냥 새벽시장이 열리면 가서 지방에서 올라온 의류상인들이나
 
사입자(지방 상인들의 주문을 대신받아 서울에서 물건 떼다가 주고 수수료 받는 사람들)들의
 
짐꾸러미를 보관해 주는 아주아주 간단한 일 이었다.
 
지금은 두타나 디자이너스클럽 같은 것들이 대중화 되었지만,
 
당시 동대문에는 그런 것의 시초가 '아트프라자'였다.
 
한 때, 인기를 끌었던 잠뱅이나 TBJ같은 것들이 그 곳의 1평 남짓한 점포에서 태동했었다.
 
암튼..동네 선배들이 '아트프라자'가 개업할 때 부터 그 알바를 하게 되어서
 
동네 선후배들 끼리 쭉 대를 이어(?) 하던 알바였다.
 
처음 내가 시작할 때는 밤10시에 시작해서 새벽2시면 끝났었다.
 
그렇게 4시간 일하고 일당은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3만5천원이었다.
 
경쟁이 격화되면서 나중에는 점점 근무시간이 늘어나서
 
나중에는 9시30분 - 새벽3시까지로 늘어나긴 했지만...
 
일당만 해도 당시로서는 꽤 큰 돈 이었는데 일당 외에 가외수입이 꽤 되었었다.
 
상인들이 가져다 주는 먹거리나 음료는 너무 많아서 바로 옆의 수위아저씨들과 나눌 정도였고,
 
거의 매일 꼬박 1만원-3만원 사이의 팁이 들어왔다.
 
보통 단골들이 많이 줬었다.
 
단골들은 한쪽에 자리를 만들어 놓고 따로 번호표도 안받고 짐을 받아 줬었다.
 
그 사람들은 워낙 짐이 많으니 오히려 번호표를 받는 것이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거라
 
그냥 관행상 번호표 없이 짐을 받았다.
 
사람들이 팁을 주면 우리는 각 자 가지지 않고 모두 모았다.
 
그 돈으로 집에 갈 때 택시비를 하고 남는 돈은 똑같이 나눴는데
 
그게 일당과 비슷할 때가 꽤 되었다.
 
거기에 설이나 추석 혹은 크리스마스 같은 대목이 되면 단골들이 한몫 크게 팁을 주고는 했었다.
 
거의 일인당 돈 십만원씩은 돌아가게 각각의 단골들이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대목을 앞두고 일주일 정도는 하루에 2-3십만원씩 챙겨갈 때가 많았다.
 
보통 때는 일주일 꼬박 일하면 일당 21만원에 팁이 15~30만원 사이였고,
 
대목 때는 일당 제외하고 팁만 일주일 동안 100-150만원 정도 되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시 대기업들의 대졸 초봉이 1200~1500만원,
 
당시 최고로 각광받던 직장이던 단자사들이 1800만원 정도 줄 때 였다.
 
 
그때는 IMF 직전이라 거품이 최고조에 달할 때 였다.
 
허름한 지게를 지고 상인들의 등짐을 날라주던 지게꾼이 되기 위해서는 권리금만
 
5천만원 하던 때 였다.(당시 압구정 현대 아파트가 2억5천만원~3억원 정도 했다.)
 
그렇게 권리금을 줘도 열심히 하면 1년이면 권리금을 뽑고도 남을 정도 였다.
 
한번에 5천원,1만원씩 하룻밤이면 15-30만원은 지게꾼들이 벌던 때 였다.
 
바야흐로 동대문 전설의 태동기였다.
 
 
내가 거기서 알바를 뛸 때, 바로 뒤 편의 디제이박스에서 디제이를 보던 사람이
 
김종환이라는 가수는데 거기서 디제이를 보면서 앨범을 냈는데
 
그것이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존재의 이유'였다.
 
당시 아트프라자의 디제이박스는 전국에서 제일 유행이 빠른 곳 이었다.
 
거기서 틀어주던 노래는 빠르면 1-2달 안에 전국적으로 히트를 쳤다.
 
그래서 그랬는지 가끔 신인가수들이 노래 좀 틀어달라고 찾아오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런 케이스 중에 하나가 자자였고 그렇게 아트프라자 디제이박스에서 주구장창 틀어주던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버스안에서'였다.
 
 
돈이 넘치던 동대문새벽시장이었기 때문에 그 동네의 물가는 상상의 초월했었다.
 
상가 뒤편의 식당들은 백반류를 제외하고는 기본 7-8천원은 줘야 뭘 먹고,
 
만원이 넘어가는 메뉴들이 수두룩했었다.
 
그나마 싼 곳이 건물과 건물 사이에 가건물로 지어 반찬 3-4가지 정도 주던 백반집이었는데
 
거기도 5천원이었다.(우리는 소위 주인아주머니와 친해서 3천원에 먹었었다.)
 
몇 년 뒤에 생긴 우노꼬레라는 상가의 꼭대기에 있던 당구장은 무려 10분에 2천원이었다.
 
 
암튼 그렇게 두 군데서 어지간한 회사원 보다 더 많은 돈을 알바로 벌었었다.
 
물론 대부분 학교에서 술값과 연애질로 대부분 탕진했지만 ㅠ.ㅠ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알바.
 
이건 동대문운동장 뒤편의 신당동 쪽에 있던 작은 음료창고에서 짐나르는 일이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은 없고 그냥 당일이나 전날 혹은 알바하는 날에 언제 한다고 연락오면
 
그때에 맞춰서 가서 30분 내지 1시간 정도 빡시게 대형트럭에 실려온 음료, 물 등의 박스를
 
하차하여 창고 안에 들여다 놓고 쌓으면 끝나는 일 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요령이 없어서 캔음료는 4박스 정도, 1,5리터 피트병은 2박스 정도 날랐지만
 
나중에는 요령이 생기니 캔음료는 6-7박스, 생수병은 4박스 정도를 나르게 되더군요.
 
힘을 쓰는 일 같지만 실제로는 요령이더군요.
 
암튼 그렇게 3분 내지 1시간 정도 일하면 일당이 1만5천원.
 
이 알바가 좋은 것이 학교 앞에서 술 마시다가 연락 받고 가서
 
잠깐 일하고 오면 술자리 회비가 생긴다는 것 이었죠.
 
 
암튼 군대 가기 전에 피크로 알바를 많이 뛸 때 그렇게 세 가지를 동시에 했었습니다.
 
물론 동대문새벽시장 아르바이트는 저도 놀아야 하기 때문에 매일 하지는 않았고,
 
보통 일주일에 4-5일 정도 했었고,
 
학원강사는 하루,
 
음료하차는 하루 내지는 이틀 정도 했었습니다.
 
아마 지금 그렇게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습니다.
 
혈기왕성하던 20대 초반이었으니 그게 가능하지 않았나 싶네요.
 
 
다음 번에는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할지도 모를 막노동(노가다)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