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2년(헌종 8년) ~ 1896년(건양 1년, 고종 33년) 양력 2월 11일
온건 개화파이며 갑오개혁 추진자들의 우두머리였다. 또한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조선 최초의 내각총리대신이다
사위가 이항복의 후손이며 독립 운동가이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인 성재 이시영이다.
관료와 외교관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예조 참판(외교부 & 교육부 차관)이 되고 곧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통상을 전담하는 당상경리사가 되었다. 한때 위정 척사파의 반대에 사표를 썼으나 얼마 안 가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되면서 통상사당상이 되었다(위의 당상 경리사랑 같은 직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총리 교섭 통상 사무가 되어 청과 일본을 중재하면서 민심 수습과 내정 개혁의 필요성을 고종에게 강조했으나 고종은 들어처먹지를 않았다. 드디어 1894년 7월, 일제의 강요로 세워진 초정부적 내정 개혁 기구인 군국 기무처의 총재관이 된다(제1차 김홍집 내각). 이 당시 그의 활약은 놀라운데, 12월에 군국 기무처가 해체될 때까지 1차 갑오 개혁의 총 책임자가 되어서 약 210건의 개혁을 단행했음
그가 갑오개혁 때 단행한 개혁들은 지금 봐도 놀랍다.
1. 궁내부 설치와 의정부의 6조를 8아문으로 고치는 관제와 직무 개편 작업 - 고종 개새끼가 정치에 깽판 놓지 못하게 차단. 왕정과 정치의 분리
2. 신분제를 철폐하고 문벌을 전부 폐지. 한때 전국민의 40%가 노비였던 조선시대에 신분제는 서류상 모두 없어진다.
3. 조세의 금납제 시행. 쌀, 콩으로 세금 납부하지말고 화폐로 납부하라 명령
4. 전국의 난립하던 도량형을 일률적으로 통일, 은본위 화폐제 시행
5. 과거 제도를 폐지시키고 새로운 인재 등용 제도를 시행하였다.
6. 근대적 경찰제도를 도입하고 기존 난립된 군제를 전부 폐지.
7. 양반들의 악습이었던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일본의 영향력이 강했으나 김홍집은 이 기회를 살려 조선을 완전히 탈바꿈시키고자 일본이 놀랄 정도로 강력하고 의욕적인 개혁을 시행했으며, 이 갑오개혁은 훗날 조국 근대화의 발판이 된다.
청일전쟁 이후, 2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고, 김홍집은 조선에서도 근대화가 성공할 수 있으리라 보고 강력한 개혁을 더욱 추진하게 된다.
1. 청나라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 독립(自主獨立)의 터전을 튼튼히 세운다.
2. 왕실의 규범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 및 종친(宗親)과 외척(外戚)의 본분과 의리를 밝힌다.
3. 임금은 정전(正殿)에 나와서 시사(視事)를 보되 정무(政務)는 직접 대신(大臣)들과 의논하여 재결(裁決)하며 왕비나 후궁, 종친이나 외척은 정사에 관여하지 못한다 왕실에 관한 사무와 나라 정사에 관한 사무는 반드시 분리시키고 서로 뒤섞지 않는다.
4. 의정부(議政府)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와 권한을 명백히 제정한다.
5. 백성들이 내는 세금은 모두 법령(法令)으로 정한 비율에 의하고 함부로 명목을 더 만들어 불법적으로 징수할 수 없다.
6. 조세나 세금을 부과하는 것과 경비를 지출하는 것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할한다.
7. 왕실의 비용을 솔선하여 줄이고 절약함으로써 각 아문과 지방 관청의 모범이 되도록 한다.
8. 왕실 비용과 각 관청 비용은 1년 예산을 미리 정하여 재정 기초를 튼튼히 세운다.
9. 지방 관제를 빨리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
10. 나라 안의 총명하고 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널리 파견하여 외국의 학문과 기술을 전습 받는다.
11. 장관(將官)을 교육하고 징병법(徵兵法)을 적용하여 군사 제도의 기초를 확정한다.
12. 민법(民法)과 형법(刑法)을 엄격하고 명백히 제정하여 함부로 감금하거나 징벌하지 못하게 하여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13. 인재 등용에서 문벌에 구애되지 말고 관리들을 조정과 민간에서 널리 구함으로써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그러나 개혁을 중단시킨 자가 있었으니,,,
1895년 4월 삼국간섭이 일어나고 박영효 내각이 붕괴된다. 안 그래도 일본 우위의 방식이 마음에 안 들던 고종 개새끼는 바로 김홍집을 파면. 1895년 5월 17일에는 일방적으로 갑오 개혁 무효를 선언해버렸다.
이후 임시로 박정양 과도 내각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것도 동년 7월 박영효의 반란 음모 사건이 터지면서 또 붕괴. 이번에는 민비가 주도해서 친미, 친러파에 더해서 김홍집과 다시 제휴하여 제3차 갑오 개혁을 시도했다.
한마디로 개판 오분전이었다.
그러나 국민쌍년 민비가 1895년 민주화되고
김홍집은 다시 개혁을 밀어붙였다. (땅크ㅆㅅㅌㅊ)
이 때 밀어붙인 개혁은 다음과 같다.
1. 양력의 채용
2. 종두법의 시행
3. 중앙군으로 친위대, 지방군으로 진위대 설치
4. 단발령의 시행
5. 소학교의 설치
6. 건양 연호 사용
이런 틈에 끼어 있던 김홍집은 을미 개혁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결국 욕이란 욕은 다 먹게 되었다. 이 때 김홍집은 국모 시해의 책임을 지고 자결을 하려 했으나 대감이 죽어서 이 일이 해결된다면 모르겠으나 실상은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유길준의 만류로 그만뒀다. 이때 김홍집이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유길준 사진
유공(유길준) 그대가 말하는 뜻은 다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의 보전과 개혁을 위하여 모든 굴욕을 참아 왔으나 이번 사태만은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써 또 일국의 중신된 자가 국모의 참변을 보고 어찌 살아서 폐하와 만백성을 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유공의 처지와 다릅니다. 유공은 어떤 난국이라도 극복해서 앞으로 이 나라를 건져야 할 사명이 있지만 내가 할 일은 이제 내 스스로 죽는 일 밖에 없습니다.
김홍집은 자신의 운명이 민주화라는 것을 이때 직감하였고, 그는 죽기 직전까지 개혁에 몰두한다.
그러나 ,,, 고종은 또 대단한 일을 해내게 된다.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일국의 왕이라는 자가 외국 영토인 대사관으로 도망을 친 것이다.
이에 개혁파들은 전부 혼비백산해서 외국으로 망명을 가버렸으나. 김홍집 만큼은 텅텅비어있는 나라의 정부에 꿋꿋하게 남아 있었다....
유길준, 조희연, 장박 등이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망명하는 와중에 김홍집은 고종을 직접 배알하여 회심을 촉구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죽을 각오로 거리로 나섰다.
지금 나섰다가는 죽을 것이라고 만류하는 일본군을 "시끄럽소! 일국의 총리로서 백성에게 죽는 건 천명이오!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까지 받아서 살고 싶지는 않소!"라고 뿌리친 후 직접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다가 조선 순사에게 붙잡혀 정병하와 함께 광화문 앞으로 끌려간 다음 분노한 군중들에게 돌을 맞고 집단 구타당한 끝에 숨을 거뒀다.
군중들은 이에 끝내지 않고 이 두 대신들의 사지를 찢고 종로까지 그 시체를 끌고 가면서 그야말로 광화문 - 종로 거리를 피의 거리로 만들어버렸다. 김홍집의 가족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연좌를 통한 처벌이 내려질 것을 예상한 그의 부인은 아들을 죽이고 자결했다.
이에 고종은 또다시 갑오개혁을 무효 선언한다,,,,(끈기 ㅆㅅㅌㅊ) 그러고는 자기들과 같은 전제군주정인 러시아 체제를 본받아서 연좌제폐지, 고문금지 다 좆까고 개혁파들을 일거에 조져버렸다고 함
이때 윤치호는 김홍집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고종이 있는 한 독립이란 있을 수 없다"
3줄 요약.
1. 개화기에 스스로 총대를 매고 개혁을 주도한 김홍집이라는 땅크가 있었다.
2. 그런데 개혁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무조건 갈아엎는 고종이라는 새끼도 있었다.
3. 결국 김홍집은 인민재판처럼 분노한 군중들에게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죽어버린다.
[출처] 조선의 마지막 개혁가, 김홍집에 대해 알아보자.araboja
[링크] http://www.ilbe.com/11161374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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