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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창씨개명의 진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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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창씨개명률은 79.3%로써. 당시 조선인구 2400만중 1800~2000만명은 창씨개명을 했어.


하지만 일본우익들은 창씨개명이 조선인의 자발적 행동이었다고 주장하고있지. 


이것은 조선인이 일제에 순응했다는 증거가 될수도 있어서 그에 대한 반박을 해볼까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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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창씨개명계를 내기 위해 시민들이 경성부청(현 서울시청) 호적과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



1940년대 일제는 군국주의화, 전체주의화가 극도로 도달하고 있었어. 그 정책의 일환으로 모든 외지의 황민화를 추구했고.


한국과 일본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주장하기 시작하지.


그 일환으로 추진된게 한국인의 이름을 말살하고 일본식 이름으로 개칭하게한, 창씨개명이야.


1939년 11월, 제령 제 19호로 조선민사령을 개정하게 되는데, 여기 창씨개명이 포함된다.


1940년 2월 11일 부터 시작했는데, 문제는 시한이 6개월이었단거야. 그러니까 1940년 8월까지 조선인들의 창씨개명을 완료하라는 거였지.






2. 창씨개명은 강제였는가 자발이었는가?


요약 : 극초기에는 강요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강제, 강요로 변해갔다. 


30년간 지배하면서 일본화 된줄 알았던 조선민중들이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다는것에 격분, 창씨개명을 밀어 붙이게된다라고 설명할수 있겠다.


시간도 6개월로 촉박했고, 당시 조선인은 2400만명이었는데 어떻게 다 창씨개명시키노? 그래서 존나 강요했다 이거임.


당시에는 컴퓨터도 없었고 고도의 전산작업도 없었음. 즉  지금보다 시간이 훨씬 더걸린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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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의 기회줄뿐, 강요하지말라. 1940년 3월 6일 석간 제 2면에 실렸던 뉴스야.


창씨개명 시행한지 1달도 안된시점이지. 아직까진 일제의 여유로움을 느낄수 있는 부분임.


" ㅋㅋ 일본제국은 관대하다. 강요안할게. 그냥 하는게 좋을걸? " 이 뉘앙스임.



자 그럼 창씨개명 정책 시행 3개월후의 성적표를 한번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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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부터 5월까지 창씨개명 기간 6개월중 반 이상이 지나갔는데 자발적으로 창씨개명 한 자는 4300000호 중에 150000호.


4%도 안되는 수치임을 알수있지. 당시 일제는 "아직 초기다. 나중엔 늘어나겠지 ㅋㅋ" 하고 자위하다가 이젠 슬슬 강요하려고 발동걸기 시작함



일제는 창씨개명을 단계적으로 홍보해나갔어.


[1단계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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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사람의 운명은 이름에 달려있당께. 좋은 이름은 행복을 가져온당께.


그니까 빨리 개명결단 하랑께




[2단계 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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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조선인 성님들 이것보소잉 너희민족의 대표적인 소설가인 이광수 성님도 창씨개명에 앞장섰당께


그러니까 빨리 하라고



[3단계 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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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하면 열차 태워드림 ^^ 


슬슬 일제는 나이든 노인들 속이면서까지 구차해지기 시작했지.



[4단계 협박]


① 자녀에 대해서는 각급 학교의 입학과 진학을 거부한다. 

② 아동들을 이유없이 질책·구타하여 아동들의 애원으로 부모들의 창씨를 강제한다. 

③ 공·사 기관에 채용하지 않으며 현직자도 점차 해고조치를 취한다. 

④ 행정기관에서 다루는 모든 민원사무를 취급하지 않는다. 

⑤ 창씨하지 않은 사람은 비국민·불령선인으로 단정하여 경찰수첩에 기입해서 사찰을 철저히 한다. 

⑥ 우선적인 노무징용 대상자로 지명한다. 

⑦ 식량 및 물자의 배급대상에서 제외한다. 

⑧ 철도 수송화물의 명패에 조선인의 이름이 씌어진 것은 취급하지 않는다.


- 브리태니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0c1824a]



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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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만에 15만에서 2배 폭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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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또 한달뒤. 30만에서 107만으로 3배 폭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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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밀어붙이고 난뒤 7월 중순. 백오십여만호. 약 37%정도 완료했다는걸 볼수있음.


초창기 3개월간 3%밖에 못했는데, 그 후 2개월동안 30%이상 창씨개명한게 강제가 아니면 무엇일까요? ㅎㅎ


그리고 대망의 8월 11일. 최종적으로 320만 116호를 창씨개명시켜버림 


이는 약 79.3%에 달하는 수치. ㅎㄷㄷ하노



2월부터 5월까지 : 4%


일제 : 이새끼들이!


5월 부터 8월까지 : 80%


이게 강요가 아니랑께? ㅋㅋㅋㅋㅋ


5월 부터 8월 11일까지 약 90일간 300만호가 창씨개명했는데 이는 하루에 3~4만호씩 


인구로 따지자면 하루에 20만명 정도가 전국에서 창씨개명을 했다는것.


천황명이니 안따를수 없어서 나머지 3개월동안 강제적으로 실시해서 80%까지 그 수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린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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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을 얼마나 형식적으로 밀어붙였는지 


한국인들은 자기가 창씨개명을 뭘로했는지도 까먹어서 예금 4억 2천만원이 주인이 사라져버림 ㅋㅋㅋ(얼마나 관심없었는지 증명되는 뉴스)


씨발 말이 4억 2천이지 1946년에 4억 2천이다 ㅋㅋㅋㅋㅋㅋ



3. 일뽕들의 마지막 보루. 경향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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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소수의 인사만이 창씨개명을 거부했당께! 많은 한국인이 자진해서 신사참배 했당께. 1968년 경향신문 기사임.


아니 시발 애초에 근거도 없이 기사 싸지른게 증거가 되는지 의문이 되기는 하다만 반박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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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원본 뉴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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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말할수 없는 B나라의 이름을 말할수 없는 H설교사의 말을 풀어 옮겨보겠다는 기자의 패기. 


전제부터 카더라를 깔고 들어감


"보았다"는 애매모호한 단어를 쓰면서 기사의 신빙성이 매우매우 높아짐을 알수있지?(비꼬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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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말할수 없는 남미의 B국에서 한국인이 밀입국 하니까 한국인은 누구인가? 라고 한번 연구라도 해보자고함.


그 한번 연구에 3개월이란 시간에 많은비용을 투자했다고함. 근데 근거는 죄다 이름을 말할수없는 H 설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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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위에나온 기사의 원문이 나옴. 결론은? 


이름을 말할수 없는 남미의 B국이란 나라가 지 좆대로 판단해서 글 싸지른거. 그걸 옮겨적은게 경향신문 기자고.


한마디로 창씨개명이고 신사참배고 자진했다는 증거는 될수 없다는거지. 씨발 남미의 B나라가 멋대로 씨부린게 증거랑께? 


애초에 실체도 없음. 죄다 H설교사 카더라임. 1968년이면 한국은 개듣보 나라일텐데 남미의 B국은 돈이 펑펑 남아 돌았나봄


쓸데없는데에 돈쓰는거 보니.



[아마 내생각엔 1959년 국교하고 1963년부터 브라질 이민이 늘어난걸로 볼때 B나라는 


브라질같긴함.]



창씨개명은 반강요였지 창씨개명이 자발적이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어요 ^^






3줄 요약 : 1.일제는 황민화를 위해 창씨개명을 밀어붙였다.

2. 기한은 6개월, 처음 3개월은 4%에 그쳤으나, 일제의 반강요적 정책으로 남은 3개월간 80%까지 끌어올림.

3. 경향신문 기사도 개병신 자료로서 이름을 말할수없는 남미 B국의 보고서가 그 증거.

창씨개명이 자발적이었다는 증거가 될수없음. 즉 일말의 가치조차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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