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중세 영어에서 '알리다'는 의미의 'Advertisen'으로부터 어원을 찾을 수 있는 광고는 오늘날 특히 어떤 곳에서든 쉽게 접할 수 있다.
우리가 매일같이 들여다보는 스마트폰을 비롯하여 컴퓨터, TV 등 영상매체를 제외하고도
집만 나서면 도처에 흩뿌려져 있는 전단지들부터 밤을 아름답게 수놓는 전광판들까지, 광고는 정말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자 그렇다면 이처럼 늘 우리의 이목을 사로잡는 광고의 오랜 역사는 어떻게 될까
캐릭터를 설정함으로써 매출 상승을 달성하는 광고 전략은 광고계의 큰 별, 레오 버넷(Leo Burnett)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시리얼 상품하면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캘로그의 토니 더 타이거(Tony the Tiger)나
콩 통조림 제품의 졸리 그린 자이언트(Jolly Green Giant), 말보로 담;배의 말보로 맨(Marlboro Man) 모두 그의 작품이다.
특히 말보로 맨은 광고 역사에서 꽤나 큰 성공을 거둔 사례이다.
말보로 맨이 본래 말보로 담;배사가 추구하던 브랜드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정반대의 위험천만하고 혁신적인 광고 시도였던 것을 고려해본다면 말이다.
1920년대 말보로가 처음 판매되었을 때 주요 고객층은 여성이었다.
그래서 립스틱 자국을 가려주기 위한 붉은 색 필터가 부착돼 있었고 여성들의 관심을 끌 '5월처럼 부드러운 담;배(Mild as May)'라는 광고 문구를 어필했다.
하지만 몇십년이 지나 매출량이 계속 저조함에 머무르자 필립 모리스(Philip Morris)사는
말보로를 남성용 담;배로서 과감히 탈바꿈시키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말보로 맨이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종전 후 다시 생업으로 복귀한 수많은 남성 고객들을 겨냥한 말보로 맨 광고 전략은 결국 히트를 쳤다.
남성성을 부각하며 자유로움에 대한 남자들의 환상을 충족시켜 주는 듯한 카우보이 말보로 맨과
더불어 '멋스러움이 있는 곳으로의 초대(Come to where the flavor is)'라는 광고 문구가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말보로 담;배는 말보로 맨 광고 이후 급격한 매출 상승을 거둘 수 있었고 캐릭터 광고의 거대한 효과를 여지없이 증명해 보였다.
물론 광고 역사의 시작은 이보다 훨씬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약 3000년 전 바빌로니아 문자로 된 포도주 광고가 있는가 하면 그리스나 폼페이 유적의 성벽엔
1세기 경에 제작된 선거 후보 유세 및 운동 경기 알림문을 비롯한 각종 홍보물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상인 계층이 자리잡은 중세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으므로
특정 상징들과 고대 그리스로부터 전해내려온 악사들을 동반한 소리꾼들이 광고를 도맡아 했다.
그리고 그 상징들 중 전당포를 의미하는 막대에 연결된 세 개의 원 표시와
오늘날 연식을 자랑하는 이발소에서 볼 수 있는 알록달록한 회전 막대는 무려 이 당시부터 사용되던 광고 상징물들이었다.
1448년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판 인쇄술에 크게 공헌한 뒤로는 광고계에도 보다 혁신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전보다 문맹율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상업 활동이 크게 활성화되며 광고의 필요성도 전에 없이 부각된 탓이었다.
그리하여 1477년, 이러한 인쇄술을 활용하여 처음 제작된 광고문의 대상은 바로 책이었다.
영국의 윌리엄 켁스톤(William Caxton)이 남는 종이에 책의 출판을 알리는 광고문을 인쇄한 것이다.
이후 이에 감명받은 유럽의 수많은 상인들과 출판업자들은
앞다투어 담;배나 차 등 다양한 상품을 선전하는 벽보를 제작했고 런던의 거리는 금세 벽보 천지가 되었다.
한편 시간이 흐르자 벽보를 뛰어넘어 수많은 광고문을 한번에 게시할 대중매체, 신문의 등장이 도래하였다.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신문이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17세기.
물론 그 당시엔 신문에 광고가 실리지 않았다.
고작 한 장의 종이에 인쇄돼 출판되었던 런던 가제트(The London Gazette) 신문엔 빽빽이 기사거리만을 담기에도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신문에 광고가 실린 것은 1625년 영국에서였다.
미국에선 1704년, 보스턴 뉴스레터(The Boston News-Letter)가 발행되기 시작하며 제 3호부터 신문 내에 광고가 게시되었다.
그리고 보다 대중들의 이목을 끄는 광고문의 삽화가 사용된 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의 아이디어가 시발점이 된 1728년 펜실베니아 가제트(The Pennsylvania Gazette) 신문으로부터였다.
18세기 중반에 이르자 이제 대부분의 신문사는 수익 중 큰 부분을 광고로부터 벌어들이게 됐다.
하지만 출판업자들은 아직 그들 나름의 자부심으로 스스로를 광고주들보다 우위라 여기며
신문 내 모든 광고문들의 글씨체를 공통으로 제한하였고 광고가 게시될 공간마저 협소하게 제공하곤 했다.
물론 광고주들은 이 따위 출판업자들의 심술에 굴할 사람들이 아니었던 지라
이내 대중의 관심을 끌 독창적인 방안을 고안해냈다.
바로 '반복' 말이다.
같은 문구를 계속 반복함으로써 강조의 효과도 얻고 기존의 밋밋한 광고문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를 거쳐 신문사 사장의 아들이었던 볼니 B. 팔머(Volney B. Palmer)가
1841년 필라델피아에 최초의 광고대행사를 설립하며 광고대행업의 시초를 마련하였다.
비록 처음엔 거의 신문사 내에 소속되어 신문에 광고가 실리도록만 했을 뿐 손수 광고를 제작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오늘날 다국적 광고그룹 Top 5 안에 드는 WPP(Wire Plastic Product) 그룹의
JWT(J Walter Thompson) 광고사도 이 당시 미국 전역에 설립된 광고 회사들 중 하나이다.
신문과 달리 한정된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광고 효과를 거둘 수 있게 해주고
광고물에 화려한 색채도 입힐 수 있도록 만들어준 잡지가 등장한 것은 남북전쟁이 끝난 후였다.
특히 사이러스 H. K. 커티스(Cyrus H. K. Curtis)가 출판한 레이디스 홈 저널(The Ladies' Home Journal)은
여성들을 겨냥한 각종 소설들과 패션 관련 글을 포함해 수많은 광고를 실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제 해를 거듭할수록 잡지에 광고를 게시하려는 광고주들은 넘쳐났고
광고 속의 제품들은 고객들에게 유통되기 위해 미국 전역을 잇는 철도망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더 나아가 자기 회사의 제품을 다른 경쟁사의 제품들과 달리 보일 수 있도록 하는
차별화 전략을 위해 상표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19세기, 비스킷을 팔던 상인들이 제품이 담긴 나무통에 생산지를 인두로 찍던 관행은
오늘날 광고의 얼굴 마담이라 할 수 있는 상표로 발전되었다.
남부 캘리포니아 과일 거래소(The Southern California Fruit Exchange)가
로드 & 토머스(Lord & Thomas) 광고사로부터 개발한 브랜드 선키스트(Sunkist)
그리고 언제나 과자 윗면엔 'OREO'가 새겨져 있는
크래프트 푸즈(Kraft Foods)의 유명 쿠키 브랜드 오레오(Oreo)가 대표적인 예이다.
상표는 고객의 소비를 특정 회사로 집중되게 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를 통한 차별화로 타사 제품을 이용하던 고객을 데려오기도 하고 나아가선 본사 제품의 매니아 층을 형성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19세기 말 경엔 기존에 별다른 상표없이 팔리던 모든 상품에 상표가 달리게 되었다.
1890년대 말 네셔널 비스킷 컴퍼니(National Biscuit Company)의 유니다 비스킷(Uneeda Biscuit)도 그중 하나다.
오늘날 나비스코(Nabisco)의 전신인 네셔널 비스킷 컴퍼니는
당시 신제품 비스킷 광고를 제작하기 위해 N. W. Ayer & Son 광고 회사에 일을 맡겼다.
그리고 N. W. Ayer & Son 광고사는 1868년 프랜시스 웨이랜드 에이어(Francis Wayland Ayer)로부터 설립된 회사로서
기존의 광고대행사들과 달리 최초로 직접 광고 제작까지 맡아하던 회사였다.
그래서 앞서 말한 유니다 비스킷의 상품명 역시 N. W. Ayer & Son 광고사의 작품이었다.
더불어 N. W. Ayer & Son 광고사는 유니다 비스킷 포장 용지의 특수 방수처리한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우비 입은 소년'을 과옥 캐릭터로 설정했고 '유니다 비스킷을 아세요?(Do you know Uneeda Biscuit?)'라는 광고 문구를 슬로건으로 활용했다.
광고 역사상으론 최초로 수백만 달러의 투자가 이루어진 대형 광고 캠페인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1900년 당시 유니다 비스킷은 선풍적 인기를 끄는데 성공했고 한달 평균 1000만개씩 판매되곤 했다.
이후 20세기에 접어들며 카피라이터 클로드 홉킨스(Claude C. Hopkins)가 유행시킨 광고의 기술은
소비자들에게 이 물건을 사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하며 강조하는 것이었다.
한 예로 슐리츠 맥주(Schlitz Beer)를 선전함에 있어 홉킨스는 맛도 양도 아니라 슐리츠사가 맥주병을 증기 세척한다는 점을 강조토록 했다.
다른 타 경쟁사들도 병을 증기 세척하긴 매한가지였지만 홉킨스는
유일하게 광고로 이를 선전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슐리츠사만이 증기 세척을 한다는 관념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실로 거대한 광고의 힘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광고의 효과는 청결함을 미덕으로 삼는 세상을 만드는 데도 크게 일조했다.
예나 지금이나 비누 혹은 세제 등의 광고에선 줄곧 청결함이 삶에 존경과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떠들어댔으며
더러운 곳엔 언제나 세균이 번식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곤 했으니 말이다.
또한 20세기 당시에 판매되던 탈취제 오도 로 노(Odo-Ro-No)의 경우
치료 가능한 질병, 암내의 직접적 원인을 노골적으로 겨드랑이 냄새 때문이라 지목하여 광고한 바가 있고
몸소 구취라는 병명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리스터린(Listerine) 구강 청결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따돌림 당하지 않으려면 청결에 신경써야함을 강조했다.
보다시피 20세기에 들어선 후론 사회 전반에 걸쳐 광고의 입지가 상당해졌다.
따라서 광고사들은 물론이고, 사람들도 보다 자극적인 광고를 찾게 됐다.
특히 옥외 광고의 경우 거리를 배회하는 잠재고객들의 시선을 낚아채기 위해 크면 클수록 유리한 면이 있었다.
쉽게 말해 대형 광고판일수록 좋았다는 뜻이다.
이는 소비자들에게 일종의 시선을 강탈하는 충격을 주는 방법이었는데
훗날 광고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는 바넘 & 베일리 쇼의(The Barnum & Bailey Show)의 P. T. 바넘(P. T. Barnum)이 가장 잘 활용하곤 했다.
'There's a sucker born every minute. (지금 이 순간에도 속기 위해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이라는 전설적인 말을 남긴 P. T. 바넘.
선도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캘빈 클라인(Calvin Klein)이나 베네통(United Colors of Benetton)과 같은 기업들은
결국 대형 광고 포스터를 적극 활용하며 큰 홍보 효과를 거두었다.
대형 광고의 뒤를 이어 핫이슈가 된 것은 바로 공중 광고였다.
1911년 신식 비행기를 타고 동부에서 서부까지 미대륙을 횡단했던
칼 로저스(Cal Rodgers)가 그 지원금의 대가로 비행기 곳곳에 빈 피즈(Vin Fiz)라는 포도주스 회사 광고를 붙였던 것이다.
물론 이는 공중 광고의 시작이었을 뿐, 진정한 광고의 묘미를 살린 것은 스카이라이팅(Skywriting)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비행기 조종사들 사이에선 이미 숱하게 알려져 있던 이 묘기를
구체적으로 글씨 쓰는데 접목시킨 이는 1921년 영국 공군의 잭 새비지(Jack Savage) 소령.
그리고 1939년부터 1953년까지 널리 쓰였던 스카이라이팅 광고 기법을 독보적으로 잘 활용한 것은 단연 펩시 콜라(PEPSI cola)였다.
공중 광고하면 1925년 굿이어 타이어(Good Year) 회사가 선보인 광고 비행선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도 간혹 모습을 비추는 이 광고 비행선이 오늘날의 굿이어 타이어 회사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 광고 효과는 톡톡했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대중화되며 운전자들을 겨냥한 광고 전략도 개발되었다.
초창기의 자동차는 내부에 라디오가 없었으므로
차가 다니는 도로에 마치 이정표처럼 광고물을 설치하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러한 노변 광고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1926년, 버마쉐이브(Burma-Shave) 광고가 등장한 이후였다.
솔이 필요없는 면도용 크림을 개발한 버마쉐이브 클린턴 오델(Clinton Odell)의 아들,
앨런 오델(Allan G. Odell)이 아이디어를 낸 이 버마쉐이브 광고는 사실 현금이 궁했던 형편에서 내린 궁여지책이었다.
다만 앨런 오델이 광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 약간의 재치를 발휘하니
운전자들이 도로를 주행하며 이어지는 작은 광고판들을 따라 읽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호기심과 재미를 안겨주던 광고판들의 끝엔 언제나 버마쉐이브 상표가 그려진 광고판이 있었다.
당시 꽤나 유쾌하다 여겨졌던 이 광고 캠페인은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 초까지 인기를 끌며 버마쉐이브 제품 매출량 상승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미국 45개 주 곳곳에 설치된 이 광고판들은 미국 고속도로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풍경을 만들어내며 남극에까지 설치된 것으로 알려진다.
옥외 광고하면 밤을 수놓는 전광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20세기 전광판들의 중심지라 하면 당연히 브로드웨이가 으뜸이었다.
남쪽의 해럴드 스퀘어(Herald Square)에서 42번가의 롱에이커 스퀘어(Longacre Square)까지 이어진
브로드웨이 거리의 옛 별명은 말그대로 '불야성'이었으니까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타임 스퀘어(Times Square)는
1904년 뉴욕 타임스 본사 건물이 신축되며 롱에이커 스퀘어의 바뀐 명칭이다.
그리고 타임 스퀘어가 새로이 옥외 광고의 명소로 자리잡는 데엔 오스카 J. 구드(Oscar J. Gude)의 영향이 컸다.
그도 그럴 것이 구드의 광고판들은 형형색색이었을 뿐 아니라 독보적으로 특출난 외관을 뽐내곤 했다.
특히 1912년에 제작된 코티셀리 실크(Corticelli Spool Silk)사의
실 갖고 노는 7m 크기의 새끼 고양이는 그의 작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1920년대 유연한 네온 튜브의 등장은 이러한 전광판들의 개성과 화려함에 수준을 더해주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네온 사인 광고판은 1936년 타임 스퀘어에 세워진 리글리(Wrigley)사의 스피아민트(Spearmint) 껌 광고였다.
보기 드물게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던 전광판이었으니까.
물론 규모를 넘어 광고판에 독특한 아이디어를 가미한 것은 천재라 불리는 더글라스 리(Douglas Leigh)였다.
한 예로 만드는 족족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리의 옥외 광고물 중 초기작인 카멜(Camel) 담;배사의 광고판은
1941년에 제작된 이래 타임 스퀘어의 명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광경을 연출했던 이 광고판은 광고 내 담;배 피우는 남성의 입에서
4초 간격으로 연기를 내뿜도록 만들어졌는데 실로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뭐 광고의 메카였던 타임 스퀘어의 명성은 이후 1970년대에 접어들어 성행했던 매춘으로 인해 퇴색되는 듯 했지만
이후 다시금 관광 명소로서 떠오르며 요즘은 전 세계인으로부터 사랑받는 장소가 되었다.
사실 1920년대에는 네온 사인의 등장 외에도 광고계의 혁명이랄 만큼 큰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라디오의 탄생이었다.
다만 1920년 11월 2일 KDKA로부터 세계 최초의 정규 라디오 방송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한동안 방송엔 광고가 포함되지 않았다.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나 제네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과 같은 초창기 라디오 방송 사업주들은
광고료를 받기보단 라디오 자체를 판매하는데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영 방송국의 개념이 없었던 자유의 나라 미국에선 라디오 판매만으론 방송 사업료를 충당하긴 어려웠고
이내 방송국의 재정에서 큰 부분이 광고료로 매꿔졌다.
그리하여 최초로 방송된 라디오 광고는 1922년 8월 뉴욕시의 WEAF 방송국으로부터 송출된 부동산 회사 광고.
당시 완공된 지 얼마 안 된 #7 지하철 근처였던 퀸즈(Queens) 잭슨 하이츠(Jackson Heights)의
신설 아파트 단지를 홍보하는 퀸즈보로(Queensboro)사 광고였다.
약 10분 간 방송된 광고료는 50달러였는데 그 후 몇달 안에 퀸즈보로사가 올린 매출은 무려 127,000달러에 달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광고 효과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라디오 광고에 열광한 광고주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라디오 프로그램 제작비를 전부 지급하기에 이르고, 인기 방송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방송 내내 틈만 나면 스폰서 명을 언급하는 게 관행이었던 당시에
인기 라디오 방송의 뒷배가 된다는 것은 곱절의 광고 효과를 거두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0년대 말,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라디오 프로그램들은 저마다 독점적인 스폰서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크게 인기를 끌었던 것은 아모스 & 앤디 쇼(The Amos n Andy Show)로
각각 아모스와 앤디 역을 맡았던 프리먼 고스든(Freeman Gosden)과 찰스 코렐(Charles Correll)이
독특한 사투리의 흑인 억양을 흉내내며 진행하는 라디오 쇼였다.
1929년 8월 첫방송된 아모스 & 앤디 쇼의 스폰서였던 레버 브라더스(Lever Brothers)사의
펩소던트(Pepsodent) 치약 광고 효과가 대박난 것은 물론이었다.
방송이 시작된 이후 7개월 간 레버 브라더스사의 주가가 폭등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시청자들이 있었느냐면 어느날 방송 중 앤디가 연필이 필요하다고 하자
열흘 뒤 총 350만 자루의 연필이 방송국으로 배송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이야 흔한 CM송 역시 이 시절 라디오 광고 방송의 흥행과 함께 처음 제작된 것으로
위티스(Wheaties) 시리얼사가 최초로 선보였다.
가정주부들을 겨냥해서는 프록터 & 갬블(Procter & Gamble)사나 옥시돌(Oxydol)과 같은 각종 세제 회사들이
소프 오페라(Soap Opera) 즉, 일종의 귀로 듣는 드라마를 방송하곤 했다.
옥시돌이 지원했던 마 퍼킨스(Ma Perkins)가 그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처럼 라디오가 광고계를 장악했던 시기가 무색해질 만큼 더 큰 열풍을 이끌고 찾아온 것이 있었으니, 텔레비전이었다.
광고의 폭발적 증가에 크게 기여하고 앞선 여느 매체들보다도 자극적인 메시지를 던질 수 있었던 텔레비전은 1927년에 개발되었다.
그 후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지만
미국인을 비롯한 세계인의 안방에 텔레비전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부터였다.
텔레비전은 시간이 흐른 1946년경에도 미국에 채 10만대가 되지 않았고 다른 나라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곳이 더 많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5년 뒤엔 어느정도 물량이 풀리긴 했지만 말이다.
라디오를 제치고 새롭게 부상한 텔리비전 방송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광고 수익에 의존했다.
이미 라디오 방송 광고를 경험했던 많은 광고주들이
그 경력을 바탕삼아 실제로 쇼를 진행하고 드라마를 연출하는 걸 제외하곤 텔레비전 방송 역시 유사하게 운영했기 때문이다.
방송 프로그램 자체를 광고주들이 소유한 것도 물론이거니와 서로 인기 프로그램이 되어 보다 큰 광고 효과를 거두려했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렇듯 제작비로 얽힌 광고주와 프로그램 간의 관계는 방송국에 가해지는 광고주들의 영향력을 더욱 커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1950년대엔 광고주의 입김으로 퀴즈 프로그램 우승자가 미리 결정나는 사건도 종종 있었다.
아무래도 인기있고 잘 생긴 참가자가 우승을 하게 되면 시청률도 오르고 그에 비례하게 광고 효과도 상승했으니 말이다.
1959년 이 같은 사실이 세상에 폭로되자 당연히 시민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그 결과, 방송 프로그램 제작과 광고 배급 시스템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역으로 방송국이 주도권을 쥐며 프로그램 편성 시간을 계획하게 됐으며 광고주들에겐 분 단위로 광고 시간을 판매하게 된 것이다.
한편 경영자들의 영향이 강했던 초기 텔레비전 광고는
단순하고도 핵심적인 광고 문구를 계속 반복하는 형식이 주를 이루었다.
일명 하드셀(Hard-Sell)로 소비자들에게 집요하게 제품명 따위를 주입시키는 방식이었다.
테드 베이츠(Ted Bates) 광고사의 로서 리브스(Rosser Reeves)가 이런 반복 광고의 대가였다.
USP(Unique Selling Proposition) 전략이라고도 불리는 이 광고 전략은
소비자들에게 반드시 제품을 사야하는 이유를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많이 듣다보면 고객들은 당연히 이를 오래 기억하리라 생각되었기에 뜻밖으로 많이 활용되곤 했다.
아나신(Anacin) 광고는 로서 리브스의 광고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례이다.
위 영상을 보듯 망치로 머리를 내려치고 스프링이 머릿 속을 후벼파며 격렬한 번개가 번쩍이는
온갖 불쾌한 이미지들의 결합은 두통에 대한 극적인 인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그와 함께 아나신 광고는 여타 다른 진통제들 보다 '탁월하고' '빠른' 아나신의 효능 역시 강력하게 어필,
결과적으로 큰 매출 달성을 이룰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가 되자 하드셀 방식에서 나아가 좀 더 세련된 광고 방식이 추구되었다.
시청자들 수준이 상승한 탓도 있었고 광고 제작에 광고주들의 영향보다 전문 광고인의 입지가 탄탄해지자 여기저기서 창의성이 빛을 발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 광고 잡지 Advertising Age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1위에 꼽히며
단연 최고의 아이디어를 자랑했던 이는 도일 데인 번베크(DDB : Doyle Dane Bernbach) 광고사의 윌리엄 빌 번베크(William "Bill" Bernbach)였다.
빌 번베크의 작품인 폭스바겐(Volkswagen) 광고는 오늘날까지도 굉장한 수작으로 통한다.
사실 1960년대 초, 아돌프 히틀러의 나라였던 독일의 차를 미국에서 판매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는 데다
당시 미국인들 사이에선 날개달린 대형차가 유행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번베크는 폭스바겐을 신뢰할 수 있는 정직한 자동차로 소개하며
큰 것만이 미덕으로 통하던 사회에서 당당히 작은 자동차가 가지는 실용성을 광고했다.
그리고 그 덕에 비틀(Beetle)은 단종될 때까지 전 세계적으로 애용될 수 있었다.
미국 광고 산업의 상징인 메디슨 에비뉴(Madison Avenue)의 빌 번베크에 필적할 20세기 인물을 또 한명 꼽자면
1950년대를 함께 빛냈던 영국 출신의 데이비드 오길비(David Ogilvy)를 들 수 있겠다.
오길비 & 매더(Ogilvy & Mather) 광고대행사의 창립자인 그는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브랜드 이미지를 탄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DOVE creams your skin while you bathe. (목욕하며 도브 크림을 바르세요)'
그중 특히 도브(Dove)를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비누로 만든 오길비의 광고는
도브의 구성 성분 중 1/4이 보습 성분임을 강조하여 광고했다.
또다른 수작인 맥스웰 하우스(Maxwell House) 커피 광고는 텔레비전 시청자들의 귀를 자극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커피물 끓는 소리를 멜로디화한 오길비는 이 멜로디를 맥스웰 하우스 커피와 연관시키며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일종의 이미지를 형성한 것이다.
1960년대는 최초로 여성이 이끄는 광고사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바로 메리 웰스 로렌스(Mary Wells Lawrence)가 이끄는 웰스 & 리치 & 그린(Wells & Rich & Greene) 광고사다.
메리 웰스는 독특한 유머 감각과 신나는 CM송을 곁들인 알카 셀처(Alka Seltzer) 광고들을 제작하며 성공으로 이끈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듯 시대의 흐름에 맞춰 광고 역시 발 빠르게 발전해갔다.
특히나 단순히 독특한 아이디어만으론 성공할 수 없는 세상이 도래했다는 생각이 들자
광고대행사들은 이제 고객 조사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미국에서 소비자 여론 조사가 실시되기 시작한 것은 1932년 조지 갤럽(George Horace Gallup)이
영 & 루비컴(Young & Rubicam)사의 대중매체 조사부 책임자가 되면서였다.
이제 갤럽의 영향으로 광고계도 드디어 직감이 아닌 사실적 데이터에 기반하여 광고를 제작하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천연색을 이용한 광고와 되도록 짧고 간결한 광고 문구가 보다 눈에 잘 띈다는 조사 결과,
그리고 반복은 역시 광고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는 점 등의 데이터들 말이다.
뭐 보다 자극과 반응의 상관 관계에 주목했던 그 시절엔 이러한 데이터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1970년 맥도널드 광고 캠페인은 소비자 조사 결과가 성공으로 이끈 대표적인 사례이다.
고객 조사 당시 조사원들은 소비자들에게 왜 맥도널드에 가는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를 물었는데
뭐랄까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식의 답변이 가장 많았다.
그래서 이로부터 맥도널드 마케팅 담당자들이 얻은 아이디어가 바로 '탈출구의 판매'였다.
'You deserve a break today. So get up and get away. To McDonald's ! (오늘 하루 쉬어도 돼요. 자리에서 일어나 맥도널드로 오세요!)'
맥도널드 광고는 마치 사람들이 맥도널드를 찾음으로써 지친 일상에서 탈피, 휴식을 찾을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리고 그 결과 광고 캠페인이 지속된 4년 내에 맥도널드 매출은 3배 이상 증가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후 모든 광고가 객관적인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까지도 광고의 영역은 어느정도 직감이 작용하니까.
맥도널드의 또다른 광고 캠페인 '빅맥송'이 등장한 것도 직감에 의존한 결과였다.
딱히 누구도 알고 싶어하지 않던 빅맥의 재료를 나열한 독특한 CM송 말이다.
'Two all beef patties special sauce lettuce cheese pickles onions on a sesame seed bun.
(참깨빵 위에 순쇠고기 패티 두 장, 특별한 소스 양상추 치즈 피클 양파까지)'
그전까지 광고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타코벨(Tacobell)이 1997년 광고대행사를 바꾸며 새롭게 제작한
'치와와 광고'는 객관적인 조사 데이터와 광고사의 직감 및 영감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성공을 거둔 사례다.
당시 타코벨의 주요 고객층은 조사 결과 18세에서 24세의 젊은 남성층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TBWA 차이엇 데이(TBWA/Chiat/Day) 광고사의 크리에이티브 감독
클레이 윌리엄스(Clay Williams)와 척 베넷(Chuck Bennett)은 살사 음악이 흐르는 멕시코 레스토랑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치와와 한 마리를 보고 영감을 얻게 되고 마침 젊은 남성에게 강한 호소력이 있던 치와와를 이용해 광고를 만들어보잔 아이디어를 내게 된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위의 타코벨 치와와 광고.
물론 이 광고도 성공하며 타코벨의 매출 상승에 크게 기여했다.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 곁엔 항상 인터넷이 존재한다.
물론 광고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랐고 최근엔 인터넷을 이용한 광고가 전체 광고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을 이용한 광고는 아직 그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
1984년 등장한 배너 광고가 아직까지 널리 이용되고 있는 상황이긴 하다만
앞으로 또 어떤 형태의 효과적인 광고가 등장할 지 가장 알 수 없는 대중매체가 바로 인터넷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광고는 우리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로 언제나 민감하게 반응하며 발전해왔다.
그리고 이제 광고는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와도 같다.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생김새가 달라도 코카콜라의 북극곰과 KFC의 커널 샌더스(Colonel Sanders)처럼
우리 모두가 공감대를 형성하며 기억하는 광고 캠페인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때론 큰 웃음을
때론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며
대중문화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광고는 앞으로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저번에 써놓고 일베 못 갔던 거
다시 올려본다 게이들아
3줄 요약
1. 광고의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2. 오늘날의 광고가 있기까지 여러 대중매체의 전성기가 함께 했으며 많은 광고계 수재들의 능력이 빛을 발했다.
3. 앞으로도 광고는 시대에 발맞추어 계속 발전해나갈 것이며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자료 출처
Dick Cavett. (Producer). Sean R Geary. (Producer). Weller/Grossman Productions. (Producer). History Channel. (Producer). New Vide;o Group. (Producer).
(1999). Sell & spin : a history of advertising. [Documentary]. New York : Marketed and distributed in the U.S. by New Vide;o Group,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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