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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현대 그룹의 시작과 고 정주영 회장의 일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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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베스트 원문링크 www.ilbe.com/5651086545







Prologue. 대한민국 : 이땅에 태어나서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
(현 북괴 강원도 통천군 노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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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업가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운 정주영.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
실패 다시 가출 후 결국 가출에 성공한다.

첫 가출 후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다.

흙수저에 노가다 일게이 뺨치노...

이것을 시작으로 정주영은 무려 4번이나 가출을 시도
두번째 가출은 금화에서 가서 일
세번째 가출은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들도 먹튀하여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잡혀 고향으로 끌려감

아버지 왈 : 대학을 나온 놈도 실업자가 되는 판국에 너 같은 조선놈이 올라간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건 아니다.
게다가 넌 장남이고 농사를 지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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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가출은 1933년 19살의 나이로
인천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경성으로 상경 후 이듬해 복흥상회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
집을 나온지 3년이 지나 월급이 쌀 20가마가 됨.
(이거 지금으로 계산하면 얼마정도되냐?)

이때 복흥상회의 주인은 정주영의 뛰어난 능력을 알아보았는데
장부처리 능력 ㅆㅅㅌㅊ
한마디로 돈계산 빠르고 검소해 계집에게 빠진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가게를 물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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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1월 23일 밤
정주영은 변중석 집에서 처음 대면한다.
당시 소녀 변중석은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는 부친의
말에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한달 보름뒤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1938년 주인으로부터 가게 물려 받아 그 주인이 되지만,
개업 후 2년 만인 1940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쌀이 배급제가 되면서
가게를 정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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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현대자동차공업사 "이봐! 해봤어?!"

현대를 설립하기 전 그는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운다.
직원 80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운영하지만,
화재로 건물이 전소해 버리는 일이 발생

다행히 평소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후원인이 거금을 빌려줘 다시 재기에 성공한다.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된다.
(쪽바리 시발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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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서울 돈암동의 스무 평 남짓한 집에서
동생들, 자녀들과 함께 벌어놓은 돈으로 살다가
해방 후인 1946년 4월 미군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 건설업에도 진출
1950년 1월 두 회사 현대토건사,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
이때 자본금은 삼천만원











But 그해 한국 전쟁이 발발
서울이 빨갱이 인민군에게 점령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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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정주영의 동생 정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하던 덕에
서울에서 하던 토목사업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서울 수복 후 미8군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한건 널리 알려져있다.















Episode 2. 현대건설 "시련이지 실패는 아니다!"

한국 전쟁 직후 현대건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교량, 도로, 집, 건물 등을 복구
점차 늘어가는 건설수요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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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시멘트 공장을 설립한다 !!!"
계속해서 늘어나는 건설 수요를 감안

1964년 6월 현대 시멘트 공장을 준공
시멘트를 자체적으로 조달하기 시작한다.

그 뒤
낙동강 고령교 복구
한강 인도교 복구
제1한강교 복구
인천 제1도크 복구
등의 사업을 수주

1960년 국내 건설업체중 도급한도액이 1위를 차지한다.
1964년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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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국내 최초로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
*이때 이명박가카께서 금고를 혈혈단신으로 지키신 썰은 유명하지
(하지만 정주영 말로는 지키는 사람 중 1명이였다고 하더라. Fact)
1967년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

현대건설 내 시멘트 공장을 확장
1970년 1월 정식으로 현대시멘트주식회사를 설립
이후
현대건설과 현대세민트의 사주로 해외건설시장 확보와 낙찰 등을 이끌어내며
한국 국외의 건설시장으로도 진출한다.












Episode 3. 조선입국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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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
울산 조선서 건설 썰은 워낙 유명한데 복습차원으로 다시 적는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은 미포만 해변 사진 한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만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 유럽 이곳저곳을 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을 불러
"정회장 임자가 맡아서 해봐"

"각하 저희는 기술도 자본도 부족합니다...불..가능합니다"

"임자도 기업인 아니야? 나라가 없으면 기업도 없는거야 군말 말고 해봐 !"

이렇게 시작된 조선입국













일본, 캐나다, 미국에서 홀대받고
절대 차관을 빌려줄 수 없다는 그들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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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없는 모래밭 사진과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지폐 한장을 보여주며
"한국은 영국이 배를 만들 때 세계 최초로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든 나라입니다"
이 말에 무슨 감동을 처먹었는지 모르나 신용을 얻어 차관을 얻었다고 한다.

Fact
1. 사실 한국정부가 보증을 섰다.
2. 사진 한장, 거분석 지폐 한장이 아니라 치밀하게 서류도 준비해 갔다.
3. 당시 '판매처를 확실히 해야 돈을 빌려주겠다'는
영국 측의 입장 때문에 계약이 막판에 허무하게 가라앉을 뻔했으나
오나시스의 처남 리바노스와 독대하여 수주를 따낸다.














Episode 4. 중동신화 "고정관념이 멍청이를 만드는거야!"

1971년 2월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주식회사 등을 총괄한
현대그룹을 창립 후
대표이사 회장으로 취임
1973년 12월 중공업에 진출, 계열사인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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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시 오일쇼크로 인해 중동에 돈이 엄청나게 몰린 상태
우리나라 건설사들은 과감하게 중동시장에 진출
그 선두에 현대건설이 앞장서고 있었다.

다른 나라 건설사들이 합리적으로 100만 달러를 입찰하면
현대건설은 절반도 안되는 40만, 30만을 적어내는 식으로
수주를 따낸다.

결과물도 선진국의 건설사들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은 공사를 맡게 되었고, 이 중동머니가 대한민국의 경제를 크게 도약시킨다.
이 당시 썰이 또하나 있는데 내가 적은 이 글 참조하면 된다.

중동신화를 일군 박정희대통령과 정주영회장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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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더 정주영 회장은 공사비를 아끼고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한국에서 모든 기자재를 마련해 바지선에 실어 주베일까지 옮기기로 결정한다.

쉽게 생각하면 커다란 뗏목에 기자재 나누어 담고 앞에서 큰 배가 끌면서 12,000km 간거다.
태풍이 자주 부는 필리핀 해협, 인도양, 걸프만 등에서 난파될 가능성이 높은데 천운으로 잘 실행되.
천운이 아니었다면 현대건설 나아가 현대그룹 노짱따라 갔음
사진처럼 저렇게 큰 철골구조물을 끌고감 ㅋㅋㅋㅋㅋㅋ엌ㅋㅋㅋㅋㅋㅋㅋ

경부고속도로 건설, 자동차 산업 진출, 조선소 건설, 주베일산업항 건설 등
정주영 회장은 사운을 걸고 이루어낸 일들이 많아서 더욱 존경스럽다.














Episode 5. 알파엔진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공군사관학교 기계공학과 교관으로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 엔진을 좀 더 공부하기 위해 뉴욕주립대학교로
유학을 간 이현순
*지금은 현대자동차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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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자동차회사 GM에 입사
자동차 엔진을 연구하던 중, 한 통의 연락이 온다.
"우리나라 자체적인 엔진을 개발해줄 수 있겠나?"

정주영 회장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현대자동차에 입사

그 당시 일본 미쓰비시사의 기술을 받으며 로열티를 지불하던 현대자동차
자체 자동차 엔진을 개발하기 위한 도전이 시작된다.


미쓰비시 구보회장
"로열티 반값으로 해줄게. 대신 연구소 없애라."

정주영 회장
"성공 가능성이 있다. 계속해서 연구해라 !!!"

일본 미쓰비시사의 현대자동차 견제에도 불고
1991년 대한민국 최초 "알파엔진"을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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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비싼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갑질하는 미쓰비시사에 보란듯이 그동안의 설움을 설욕하게 된다.

여러모로 자동차산업에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 지금같은 세계적인 자동차강국이 된 이유에는
이현순 개발자와 같은 엔지니어의 열정과 노력도 있지만 정주영 회장의 미래를 보는 깊은 안목으로
일궈낸 성과이기에 가능 했던 것.

오히려 현재 2002년 개발한 "세타엔진"으로
일본 미쓰비시사에 엔진 기술을 수출하며 역관광















Epilogue. 이 땅에 태어나서 : 나의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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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되어
일선에서 물러난 뒤 대북사업에 관심을 쏟았다.
2000년 5월 건강을 이유로 명예회장직을 사퇴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편안하지 못했다.

왜 그런가 하면 자녀가 많기 때문.
정몽필 (전 인천제철-현 현대제철 사장,1936-1982),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정몽우(전 현대알루미늄 사장, 1945-1990), 정몽헌(전 현대그룹 회장, 1948-2003)
정몽준(현대중공업 대주주, 전 FIFA 부회장), 정몽윤 (현대해상화재 고문)
정몽일(현대기업금융 회장)
등 8남 1녀(정경희)

장성한 자녀들이 불화를 일으키기 시작

"현대판 왕자의 난"
이라 부름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불화를 해소하고자 노력한다.
죽기 직전에는 "3부자 동반퇴진"을 통해
이사회, 전문경영인 중심의 투명한 경영을 천명하였다.

그 직후 2001년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을 사망한다.
사후 여러 상을 받았지만

2006년 11월 타임지
아시아의 영웅에 선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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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적 그룹인 "현대"를 일궈낸
대한민국 대표 기업인
아산 정주영

인간으로서, 기업가로서, 또한 한나라의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의 변화와 격동의 시기를 함께하며 일생 동안의
직면한 도전과 시련, 성공의 업적들

우리는 그를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1줄 요약
1. 산업역군 정주영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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