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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ssul

흔한 유부남의 인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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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다. 드디어 결혼이다.

이 여자를 갖기 위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 했는가.

그놈의 꾸밈비는 뭐고, 공동명의는 왜 하자는 건지.

이 여자 옆에 달라 붙는 놈들 때문에 마음 졸이던 시간들.

여친 친구들 방해에도 꿋꿋이 결혼을 이뤄냈다. 드디어 끝이다.

어찌됐건 아침이면 그녀 얼굴을 볼 수 있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도 그녀가 있다.

정말 행복하다. 이 순간을 위해 학창시절부터 그렇게 공부하고, 회사에서 깨져도 참고 넘겼다.

나는 정말 행복하다. 현태 그 녀석도 빨리 장가를 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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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한지 1년이 지났다. 조만간 아내 뱃속에 들어있는 내 아이가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다. 임신 테스트기를 가지고 나오며 울던 아내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벌써 우리 애기가 나온다고 한다. 초음파 사진을 보니 아기 코는 나를 닮았고, 입술은 아내를 닮은 것 같다.

의사 선생님은 파란색 옷을 준비해놔라고 했다. 남자 아이인가 보다. 딸이 갖고 싶었지만 딸이든 아들이든 어떤가.

어쨋든 내 2세가 생긴다. 너무 행복하다.

나는 너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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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두살이 채 안됐는데, 또 둘째가 생겨버렸다. 주위에서는 부부 금슬이 너무 좋다고 다들 한마디씩 해준다.

그냥 기분이 좋다. 하늘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

엊그제는 밤새 첫째 애가 울어서 한숨도 못자고 병원 응급실에서 발을 동동 굴렸다.

의사 선생님 말로는 그냥 배가 고파서 운거라고 했다. 정말 다행이다.

어제는 아내는 고향 여수에서 담근 갓김치가 먹고 싶다고 했다.

주말이라 택배는 안된다 해서 어제 장모님댁까지 밤 새워 다녀왔다.

하지만 전혀 힘들지 않다. 내 새끼가 먹는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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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은 이제 책을 읽기 시작한다. 첫째는 아들이고 둘째는 딸인데 둘다 너무 이쁘다.

함께 자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 같다.

왜 그렇게 어른들이 결혼을 해야 행복을 알게 된다 했는지 알 것 같다.

마누라는 애들 때문에 생활비가 너무 든다며 자기가 돈 관리 해야겠다고 한다. 그러라고 했다.

아 맞다. 현태 이 녀석은 그냥 혼자 살기로 마음 먹고, 작정하고 정관수술을 했다고 전화가 왔다.

극단적이고 불쌍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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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공장장한테 깨졌다. 생산관리 새끼들은 무슨 놈의 일을 제대로 하는게 없다. 허구헌 날 물량 뽑는다고 불량을 낸다.

품질관리라는게 원래 이런거지만 사원, 대리때야 어떻게든 버텼지. 과장다니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다.

젊은 놈이 라인 잘 타서 공장장까지 올라 가 놓고 나한테 큰소리다. 짜증난다.

불현 듯 어릴 때 부모님에게 혼나던 생각이 난다. 이 나이 먹어도 혼나는건 똑같구나.

하지만 책상 위에 애들 사진을 보며 오늘도 힘을 낸다. 난 가장이니까.

우리 애들은 혼내지 말고 긍정적으로 키워야겠다.

생각 난 김에 카톡 프로필에 엊그제 과학박물관에 애들과 놀러가서 찍은 사진으로 바꿔놓았다.

하지만 역시나 연락 오는 곳은 거래 업체 밖에 없다.

현태 이놈은 프로필 사진 보니 어디 등산가서 찍었나 혼자 산 위에서 사진을 찍어놨다.

외롭겠지. 불쌍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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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들어간 아들 녀석이 졸라대는 통에 강아지 한마리를 샀다.

마누라도 애들 정서에 좋다면서 찬성했다.

원래 동물은 좋아하지 않지만 애들이 좋아하니 뭐..

애들은 코카라고 이름 지었다.

코카라..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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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현태 녀석 전화가 왔다.

동창회 모임이 있다고 나와봐란 거였다.

연회비는 30만원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한달 용돈 30만원으로 식비까지 해결하는데.. 수중에 돈이 없다.

그냥 바빠서 못 나간다고 적당히 둘러대고 전화를 끊었다.

결혼하고 그나마 있던 친구였는데 현태 이 녀석도 요세 전화를 자주 하진 않는다.

무슨 낚시 동호회랑 자동차 동호회랑 산악회 가입해서 요세 그쪽 모임에 자주 나간다고 한다.

사는게 다 그런거겠지 뭐. 대신 난 가족이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놈의 휴대폰을 바꾼지가 언제더라..

휴대폰도 언제 부턴가 날 따라 늙어가는거 같다.

마누라는 요세 슬슬 잔소리가 늘었다. 애들 학교 들어가고 부터 점점 경제적으로 팍팍한가 보다.

그마저 삶의 낙이던 퇴근 후 맥주 한캔도 요센 못 마시고 있다.

그냥....

술이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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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 퇴근하면 애들 얼굴 보기가 힘들다.

그나마 퇴근하면 코카 녀석만 좋다고 달려든다.

우리 애들도 몇 년 전만 해도 이랬는데.

좀 변한거 같다.

어제 아들 방에 들어 갈랬더니 문이 잠겨있었다.

뭐하냐며 문을 두드렸더니 아빠가 무슨 상관이냐며 그냥 소리부터 지른다.

게임이라도 하나보다. 나쁜 길로만 안 빠졌으면 좋겠다.

딸도 보고 싶어 문 열고 들어가니 베개를 던지며 노크하고 들어오라며 소리를 지른다.

누구랑 통화하고 있던데.

방문을 닫고 나오니 안쪽에서 우리집 꼰대가 들어왔다고 신경쓰지 말라는 소리가 들린다.

코카 물통에 밥이랑 물이 없다.

어제도 없던거 같던데 낮에 준걸 먹은건가. 이 녀석 밥이나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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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는 얼마 전 부터 주식에 빠진거 같다.

애들 대학 가면 큰 돈이 든다고, 지금 빨리 벌어놔야 된다나..

어제는 사놓은 무슨 테크 주식이 20프로나 올랐다고 좋아했다.

우리 가족 부자되면 자기 때문이니까 무조건 자기한테 잘하란다.

그래도 결혼은 잘 한 것 같다.

혼자 살았으면 주식도 뭐도 할 시간 없어서 재테크따윈 꿈도 못 꾸고 살았겠지.

마누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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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코카 녀석이 거품 물고 쓰러지길래 동물병원에 급하게 다녀왔다.

수의사 말로는 췌장암에 위까지 암이 전이 돼서 오래 살지는 못할거 같고,

늙어서 수술도 불가능하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냥 마음이 아프고 이 지경까지 신경 못 써준게 미안하다.

집에서 내편은 이 녀석 뿐이었는데.

비록 집에 제일 좁은 방 신세였지만 이 녀석이랑 함께 있으면 든든했었다.

이 집에서 내 편이 없어진다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어제 코카 장례식을 치뤘다.

며칠간 마음의 준비를 해서 그런지 덤덤하긴 했으나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요 몇 년 간 가장 큰 힘이었는데. 많이 그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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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공장장한테 깨지고 집에 왔는데, 뭔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빨간 딱지들이 붙어있다.

마누라를 불러 이야기 했더니,

장모님이랑 처남한테 돈을 빌려주고 보증을 섰는,데 그게 좀 잘못돼서 집에 차압이 들어왔다고 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자세히 물어보니 처남이 부동산 사업을 한다고 고향 사람한테 소개 받고 여기저기 돈을 빌려 땅을 비싸게 샀는데,

그게 무슨 녹지해양 사업으로 묶여버려 매매가 불가능하게 돼 버렸다고 한다.

이자는 이자대로 불어나서 마누라한테 까지 손을 빌렸는데, 우리집에 돈이 없어서 4금융 보증을 서고 대출을 받아서 줬다고 한다.

힘들다. 어디서 돈을 벌어오지....

현태 녀석이 회사 그만두고 무슨 사업 시작해서 요세 잘 된다고 들었는데.

오랜만에 얼굴에 철판 깔더라도 그 녀석한테 전화 한 번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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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자꾸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전에 차압은 현태한테 빌린 돈으로 어떻게든 급한 불은 껐지만 이것도 사실은 다 빚 아닌가.

사는게 너무 힘들다. 자식 새끼들은 대학가고 집에 전화 한 통 없고,

아들놈은 1년에 한번 있는 무슨 영어 시험 본다고, 딸은 공무원 준비한다고 노량진 가더니 명절 때도 집에 오지도 않는다.

그닥 보고 싶지도 않다.

아내는 몇 년 전 부터 황혼 이혼이 늘었네 어쩌네 소리를 하기 시작하더니, 요즘 대놓고 이혼하자는 소리를 뱉기 시작한다.

산악회인지 뭔지 다니더니 집에도 안 들어온다. 낮에 전화걸면 옆에 남자 목소리도 들리는데 이제 그런거 신경쓰기도 싫다.

있으나 마나한 마누라, 애들 결혼만 시키면 나도 당장이라도 이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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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짤렸다.

사실 여태 버티고 온 내가 대견하다.

임원은 못 달아도 그래도 팀장은 해먹지 않았는가.

지긋지긋한 컴플레인에서 이제는 벗어났다.

하지만 막막하다. 당장 뭘 해먹고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

역시 이럴 때 생각나는건 잘나가는 친구 밖에 없다.

현태 녀석 사업에 일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거 같던데.

어쩔 수 없이 한 번 더 신세를 져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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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도장 찍었다.

어차피 잘 된 일이다. 각 방 쓴지는 20년이 넘은거 같고, 집에 들어가면 맨날 부부싸움이었다.

그 놈의 주식은 반토막 난지 옛날이고, 내가 갖다준 월급은 자식들 공부한다고 다 들어갔다고 한다.

아들 놈은 취업이 안되니 사업한다고 가져가서 감감무소식이다.

마누라 핏줄은 마누라 핏줄인가 보다.

정말 힘들었다.

가장으로 산다는게 이렇게 힘든건지 몰랐다.

회장님, 아니 현태놈이 정말 부럽다.

모아놓은 돈도 없고, 현태 밑에서 일하는 내 꼴이 너무 한심하다.

결국 얻은건 아무 것도 없고 잃은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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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현태한테도 깨지고 소주 한잔 걸치고 한강으로 나왔다.

다리 난간이 나에게 위로한다.

많이 힘들었구나.

힘들었다.

정말 힘들었다.

언제부터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인 것일까.

그땐 분명 행복했는데.

그랬던 것 같은데.

그냥 이렇게 끝내고 싶다.

이혼한 마누라, 연락끊긴 자식.

다 필요 없다.

코카가 보고 싶다.

너 죽을 때 이렇게 괴로웠구나.

미안하다. 내가 미안하다.

아파할 동안 병원 한번 못 데리고 간 내가 미안하다.

코카야. 금방 만나자. 거기서 아저씨랑 놀자.

내 인생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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